추사 김정희가 제주 대정으로 귀양을 간다. 유배 길 내내 힘들었지만 이런저런 생각으로 더 괴롭다. 가는 길 중간에 보낸 편지에 그 심경을 담았다.
“조상에게 욕을 미치게 하는 것이 가장 추하며, 몸에 형구가 채워지고 매를 맞는 것이 다음인데, 나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겪었다. 천하고금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”.
조상에게 욕 뵈였다고 속상해 한다.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을 상하게 해서 더 맘이 아프다. 아버지 김노경이 고금도로 유배간지 10년이 지났는데, 그 아버지의 나머지 죄를 물어 또 다시 고초를 당하는 실정이다.
겨우겨우 화북항에 와 배를 내렸다. 다시 대정으로 80리 자갈길을 걷는다. “사람과 말이 발을 붙이기도 어려울 정도”로 힘이 빠졌다.
홀연 멋진 나무숲이 펼쳐져 위로해 준다. 모든 것이 다 반가웠다. “간혹 모란꽃처럼 빨간 단풍 숲도 있었네, 이것은 육지단풍과는 달리 매우 사랑스러웠네”.
물만 보고 떠내려 오다가 만난 땅에 뿌리내린 것 중 반갑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. 제주 땅 그 유명한 애기단풍이 먼저 눈을 씻어주니 쌓였던 독기가 싹 가신다. 아름다운 자태로 다가와 괜찮아 괜찮아 달래준다.
억새풀 춤사위와 더불어 길 가에 늘어선 단풍이 반갑다. 육지에서 보던 것과 달리 작고 귀여워 더 사랑스럽다. 모란꽃처럼 빨간 단풍까지 마중 나와 조막 손 흔들어 준다.
“그러나 정해진 일정에 황급한 처지였으니 무슨 아취가 있겠는가”. 관아에 들려 신고를 해야 하는 일정이 급하다. 지쳐 가누기 힘든 망신창이가 된 몸도 추스려야 한다. 불편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 아취를 누리기 쉽지않다. 그래도 낯설고 물 설은 땅이지만, 새로움에 기대서 정을 붙여볼 생각이다.
온갖 생각을 걸머지고 먼 길을 걷는다. 기약 없는 삶을 의탁할 한심한 신세를 생각하며, 제주에 이르는 길에서 온갖 슬픔을 다 내 밷는다. 단풍길을 다 지나고 나니 어쩔 수 없이 다시 쓸쓸한 외로움이 길동무를 한다.
한 가닥이라도 확신이 있다면 이 쓸쓸함을 끝낼 수 있으련만... 의식이 없다면 불운하다 탓이라도 하련만...
거짓말은 할수록 많아지지만 참말은 할수록 줄어든다. 차라리 입을 닫자.
독안에 숨어도 팔자는 면하지 못하느니... 이 땅에서 새 세상을 열어보자. 떨어져 있으니 외려 세상을 편하게 관조해도 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. 모란꽃 같은 단풍이 이렇게 나지막이 속삭이며 다독거려 주는 듯하다.
* 이흥재 교수는 서울대 행정대학원 석사, 성균관대대학원 행정학박사. 전, 추계예술대학교 교수로서 문화예술경영대학원장과 문화예술경영연구소장을 지냈다. 한국문화경제학회장, 한국지역문화학회장을 맡았다. 정책현장에서 한국문화정보센터(현 한국문화정보원)소장, 전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장으로 일했다. 저서로는 왕의 소통(푸른길), 4차산업혁명과 소셜디자인 문화전략(푸른길), 문화정책론(박영사) 등이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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